일제 강제징용 관련 막내삼촌의 노력
내가 30대 초반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일제 강제 징용에 대해 예전에 얼핏 들어서 조금 알고 있었지만
막내 삼촌이 올린 글을 보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할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할아버지에 대한 일들이 잊혀질까봐 이렇게 삼촌 글이지만 빌어서 글로써나마 남긴다.
어릴 적 여름방학 시절도 그렇고, 어린초등시절도 그렇고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그리움들이 더 새롭게 다가온다.
(삼촌 글이기 때문에 삼촌의 1인칭 시점이다.)
원래 원본사진이야 막내삼촌이 가지고 있겠지만, 급하게 나마 저 편지 내용을 읽어볼려고 보정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글씨들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보다 옛날 할아버지 시절에 쓰시던 말들이라 알기가 조금 어렵다고 생각된다. 더군다나 사투리라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중간중간 삼촌이 편지를 풀어쓴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
여기 아래부터 삼촌의 시점의 글이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1년 반쯤 전에 일본의 혼슈(본도) 북서쪽 끝 아오모리로 징용당해 끌려가셨다.
동네에서 한 명씩 차출되어 갔는데 당시 구장이셨던 단산 아재께서 아버지를 지목하신 것이다. 사실 영자 항렬의 다른 사람이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분은 구장과 더 가까운 일가여서 공이 아버지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해 큰 형님을 낳고 알콩달콩 신혼에 행복해 있을 때였다고 한다. 위로는 부북면 사캐에서 시집오셨던 할머니 김해김씨가 계셨고 더 위로는 매전면 명대(온막) 출신의 증조할머니 진주 강 씨가 살아계셨다. 집은 삿갓 형님댁 옆, 지금의 마을회관이 들어선 자리---.
온갖 핑계로 소집을 차일피일 미루었지만 당국의 성화에 결국 집을 나서시는 아버지, 이웃마을의 분들과 그리고 산외면 금곡의 진 외갓집, 그러니까 아버지의 생가 외사촌 되시는 분도 함께 갔다고 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징용 장소인 아오모리로 이동을 했는데 일본의 긴 북쪽 해안선을 따라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갔다고 한다. 어머니의 증언으로는 억시기 멀게 한 참을 배로 가셨다고 한다. 일본의 군항 아오모리, 북해도를 마주한 곳의 어느 해안가에서 무슨 철로나 도로공사를 하셨던 모양---다른 것은 조선과 별 다를 바가 없는데 그놈의 추위가 문제였다. 위도상으로 우리나라의 함경도와 맞먹는 곳, 긴 겨울이 어려웠던 것이다. 안 그래도 춥게 사는 일본인들---그 추위가 가장 무서웠던 적이었다고 한다. 돌을 구워 발에 묻고 잤다라는 증언도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한편, 아들을 먼 이국의 위험지대에 보내 놓고(그것도 전쟁 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여자들만 내리 삼대가 집을 지키며 그렇게 마음을 졸이는데, 큰집의 친부모님은 사실 더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
불안한 마음을 보상이라도 할 겸 검은색 서양식 옷을 한 벌 장만해 편지에 적힌 주소로 소포를 보낸다. 장만은 양어머니 집에서 하고 친 아버지, 큰집 할아버지가 유천 역(지금의 관마 옥산리) 앞에 있던 우체국에 가서 부치셨다.
그리고 얼마 후 큰아버지는 동생을 직접 보고자 면회를 감행하신다.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부산에서 뱃길로 물어물어 아오모리까지 찾아가셨다고 한다. 그때는 두 나라가 한 나라였으니 여행이 쉬웠던 모양---그곳까지 찾아가서 큰아버지는 준비해 간 먹거리를 동생 앞에 펼쳤는데 얼음같이 차게 식었던 그 음식을 아버지는 얼마나 먹지 못했는지 너무나 맛있게 잡수시더라는 것이다. 귀국한 큰 아버지는 우리 집에 와서 보고하기는 무탈하게 잘 있더라는 말을 하고 본가에서는 울먹이며 그 말을 하시곤 하더라는 것을 큰 어머니께서 증언해 주셨다. (물론 그때 지금의 큰 어머니는 도쿄 밑의 어떤 소도시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나중에 큰집에 시집오셔서 들은 이야기라고 내게 들려주셨다) 항상 먹는 것이 부족해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아 구워 드셨다는 내용도 귀국 후 아버지는 어머니께 들려주셨다고 한다.
편지는 종종 보내오셨고 평능의 외가에도 걱정하실까 봐 편지를 보냈는데 사진의 편지들이 바로 그것으로 보인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모든 편지들을 정리, 철을 해놓으셨는데 20대 때 외가에 놀러 갔다가 그때 이 편지를 발견, 얻어와 가지고는 어딘가에 보관해 둔 것 같았는데 얼마 전 우연히 짐을 정리하면서 다시 발견한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다시 설명서를 붙여 일전에 징용 피해신청서에 보완, 첨부했다.
날짜도 없고 수신인 발신인도 명기되지 않은 편지, 징용피해 접수창구에서도 갸우뚱했지만 내용으로 봐서 그때 징용 때 보낸 편지가 확실해 보인다.
“국가 명령을 못 이기어 고향을 이별하고 수천리 타향을 내려와서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밀양에서도 수천리 내려왔다는 것은 무슨 군대나 국내의 어느 지점이 아닌, 멀리 아래 서북쪽의 아주 먼 곳 아오모리라야 말이 맞는다.
“이곳 일만은 위험한 것은 없사오나 추워서 고생이올시다. 추워서 고생이 되어도 위험한 것은 없으니 병모님 안심하기를 바래나이다”
아오모리의 추운 기후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와 함께 염려하실 처가 식구들에 대한 배려와 마음 씀이 함께 잘 나타난다. 그리고 장인 장모의 안부, 당시 나이가 어렸던 이모(처제 안오주)에 대한 안부(그때 외삼촌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도 보인다.
두 번째 편지에서는 함께 같은 장소에 끌려 간 아버지의 외사촌도 잘 있다라는 내용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 편지가 징용 때 보냈던 편지를 증명해 주고 있지 않는가? (그때 같이 간 외사촌은 일본에서도 잘 사는 가족이 있어서 그 편에서 빽을 써 일찍 귀국하고 아버지는 그냥 남겨지게 된다. 그때의 허탈과 자괴감 또한 어떠하셨을까? 어쨌든 아버지의 외가는 빵빵했었든지 아버지의 외재종 중의 한 분은 밀양시장까지 지냈던 이상조씨로 아버지가 밀양에서 입원해 계실 때 병문안도 다녀가셨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자세한 사항을 설명서에 붙여 다시 증거물로 보완해 피해신청서에 덧붙였다.
빛바랜 편지를 다시 뵈니 모정의 거인! 울 아버지가 새삼 다시 보이고 동네의 크고 작은 분쟁들을 조정하시고 그림자를 지고 삽짝 문을 들어오시던 그 장엄하신 모습이 다시 그늘처럼 아른거린다.
한 편, 해방이 되고 아버지는 석 달 쯤 뒤에 귀향하셨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안 보이시자 집에서는 그때 사망하신 줄 알고 거의 포기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 무렵에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함께 갔던 도곡의 어떤 분과 함께 돌아오셨다고 한다. 얼마나 마르고 쇠약했는지 사람이 거의 다 죽게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보상 신청은 적체된 업무로 그 처리가 늦어지고 있으며 당사자가 생존해 있거나 현장에서 사망한 경우, 돌아가셨어도 상해를 입으셨거나 노무비를 받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만 보상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경우에도 아버지의 경우는 명백한 물증이 없으므로 여러모로 좀 불리한 입장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역사에 대한 명예의 차원에서도 공식적인 확인을 받아 둘 필요가 있고 또 앞으로도 보상기준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만큼 일단 기관의 인증을 받아 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관계기관의 확인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 징용관련 2차 보고... (삼촌시점)
어젯밤에 퇴근하여 집에 왔는데 문에 등기우편이 와 있으니 경비실에서
찾아가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찾아와 뜯어보니
정부기관인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서 보낸 것이었다.
바로 아버지를 징용피해자로 인정한다는 심의,결정통보서였다.
2년간의 심사끝에(관련업무종사자보다 폭주한 신청자가 많다보니 2년이 걸렸다)
마침내 아버지를 정식 피해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인 아버지가 직접 신청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내가 피해상황을 합작으로 정리한 것도 친자관계로
불리한 국면이었는데(인후보증증언은 우선 직접적인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은 참고로만 받아줄 뿐 증언으로 채택되지 않음)
남기신 편지 두 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는지 정부가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그 편지도 수신인 발신인도 명기되어 있지 않고 연대나 날짜도 없는 것임에도 정황이나 디자인,
내용으로 봐서 증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통보서였다.
인정등록번호는 제202***호 최초 안건번호는 208***(남양주시-300***)
하지만 저 인증서는 강제동원피해를 당했다는 피해사실을 인정해 준 것일뿐
피해 보상을 보장해 주는 문서는 아니라고 바로 또 별지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보상받을 수 있는 경우는 다음 세 경우
1.징용중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경우, (사망한 경우는 바로 2천만원을 유족에게 보상)
2.징용중 급료를 받지 못한 경우(이 경우는 미수금 피해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있는 경우, 당사자나 유족에게 보상)
3.피해자가 살아서 돌아와 현재 생존중인 경우(이 경우 신청일로부터 사망시까지 의료지원금조로 매년80만원 지급)
하지만 아버지의 경우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사항이 현재로는 없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경우가 그래도 2번의 경우인데 저마저도 입증할만한 아무런 관련자료나
증빙자료가 없다. 앞으로 지속해서 찾아보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로까지 진척된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래도 일단 이렇게라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보상기준이 어떻게 달라질지도 모르므로---
큰 누님 말씀 마따나 무슨 보상보다도 아버지의
명예가 지켜지고 확인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신청시 증빙자료로 붙였던 아버지의 편지(아버지는 징용시 가끔 안부의 편지를 본가에도 처가에도 보냈는데
본가의 것은 남아있지 않고 평능 처가로 보냈던 것만 두 편 남아있음)를 다시 한번
모두들 건강하시며 특별히 어머니의 건강을 기도합니다.
여기까지가 삼촌의 글이다.
마지막에 삼촌시점에서 어머니고 나에게는 할머니인데, 수년전의 글이라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신다. ㅜㅠ
어릴적 여름이면 매일같이 개구리 잡아다가 푹~고아 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살아계실적 얼굴, 표정
주름들까지도 갑자기 그 그리움이 폭풍우 처럼 몰려온다.
부디 두분 모두 저 세상에서는 고생없는 편안한 곳으로 가셨길...
참고. 왜정시 피징용자명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가면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가 있는데
검색하면 검색결과 확인 할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손자로서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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